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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1802~85)

 

 

 

 

빅토르 위고는 브장송에서 나폴레옹 군의 군인과 낭트의 선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려 했지만 조숙했던 그는 문학에 열중하여 17세에 이미 툴루즈 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그러니까 19세 때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나폴레옹을 미워했지만 그 뒤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면서 오히려 아버지와 나폴레옹을 존경하게 되었다. 20세 되던 해 소꿉친구 아델 푸세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며, 그 해에 처녀시집 '오드와 잡영집'을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로 들어갔다.

 

1827년 간행된 희곡 '크롬웰'에 붙여진 긴 서문인 '낭만주의 선언서'는 그의 작가로서의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발휘된 글로 이때부터 왕당적인 사상을 버리고 자유주의에 동조하였다. 고전주의의 작법을 무시한 극작 '에르나니'(1830년)의 상연을 전후하여 점차 그의 생활은 분주해졌고 성격 또한 격해져 겁먹은 아내는 집에 드나들던 생트뵈브와 연애관계에 빠졌다. 이를 알게 된 위고는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괴로움도 커 1833년 부터 때마침 나타난 여배우 쥘리에트 돌루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후 수많은 여성과 연애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나온 시집에는 전보다 감정의 깊이가 더욱 드러났고 소설로는 중세 취미를 담은 '노틀담의 꼽추'(1831년)외에 정치, 역사, 도덕 등 사회적인 주제가 담겨 있는 작품을 썼다.

 

위고는 1848년의 2월혁명 발발 후 공화주의에 기울었고, 1851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영불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섬에서 19년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은 공교롭게도 장 발장의 옥중 기간과 일치할 뿐 아니라, 번거로운 파리 생활에서 벗어나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작품을 많이 쓸 수 있었다. '레 미제라블'(1862년) 또한 이 기간에 씌어진 작품이다. 1859년 피추방자 사면령이 내렸지만 위고는 나폴레옹 3세의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귀국을 거부하다가 1870년 보불전쟁 때 황제가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자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정치에 참여했으나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코뮌의 난에 회의를 느껴 점차 정치로부터 떠나 다시 건지 섬으로 가서 최후의 역사소설 '93년'을 쓰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부인은 물론 두 아들과 쥘리에트가 죽고 둘째 딸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고독한 처지에 빠졌으나 여전히 수형자르 위하여 노력하고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는 등 여러 사건에 개입하였다. 그는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기부한다. 나는 그들의 영구차로 묘지에 운반되었으면 한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사망한 후 국민적인 대시인으로 추앙되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팡테옹에 묻혔다. 일생을 창작과 사회활동으로 일관한 위고는 청년 시절엔 낭만파의 리더로, 후반엔 인도주의적인 이상주의자로서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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