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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3대 예술가의 한 사람인 라파엘로는 이탈리아의 소도시 우르비노에서 궁정화가인 지오반니 산티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로부터 그림 지도를 받다가 12세 때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 후 숙부의 보호 아래 비테의 작풍을 배우고 1500년에는 페루지아로 나가 페루지노의 제자 겸 조수가 되어 감미로운 화풍을 배운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삼미신', '기사의 꿈' 등이 있고 페루지노 최고의 기법으로 '성모 대관', '그리스도의 책형', '성모의 결혼'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로 옮겨 4년간 체류하는 동안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면서 그들의 화면구성과 명암법을 배우는 동시에 폭넓은 구도, 독특한 소묘법, 그리고 풍부한 채색 등을 익혀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는 동시에 점차 독자적인 화풍을 수립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성 모자상'을 비롯하여 '소 의자의 성모', '자화상'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1509년에는 고향 선배이자 교황청의 공식 건축가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채용되어 바티칸 궁전 서명실의 3실 벽화군 장식을 맡아 '성체의 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 '보르고의 화재'등의 대작을 그렸다. 이후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 제작 의뢰가 격증하였고, 이때 '어느 추기경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겼는데, 특히 아고스티노 치기 저택의 벽화 '푸시케 사랑의 역사'는 불멸의 명작으로 꼽힌다. 건축에도 손을 대어 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주임직과 로마 고적발굴 및 그 부흥계획 주임을 겸직하며 다채로운 활동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던 '그리스도의 변용'을 완성하지 못한 채 37세를 끝으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라파엘로의 활동과 작품을 구분하여 보면 크게 세 종류로 나타나는데 초상, 마돈나상, 벽화 장식으로 구별된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라파엘로를 타인이 하고 싶어한 것을 항상 실현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정신을 찬미하고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였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는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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